[2020.04.24 기록] 에스프레소


연어입니다.


친한 형님 한 분과 압구정동을 노닌적이 있었다. 그 날이 기억나는 이유는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셔본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 햄버거를 입에 댄 날도, 피자를 먹어본 날도 기억이 나는 이유와 같다)

형님은 마침 친구 한 명이 근처에 있는 것 같다며 그를 커피숍으로 불러들였다. 나랑 비슷한 그닥 크지 않은 키에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친구를 두고 형님이 이렇게 소개를 했다.

이 친구. 이래뵈도 싸움에서는 진 적이 없는 녀석이야. 무서운 놈이라니깐.

야. 다 옛날 얘기지 뭐. 요즘은 조신하게 산다.

근황 얘기가 오가던 중에 싸움의 신이라 일컫는 이 형님이 한물(?) 갔다고 생각되던 사람을 보좌하며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뭐랄까. 보디가드 겸 비서로 일하는건가?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모시고 있다는 분은 티비 채널 어디를 틀거나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재기에는 성공한 셈이다.

여하튼 처음(그리고 마지막) 얼굴을 마주한 싸움의 신 형님과 함께 주문한 커피가 에스프레소였다. 우리 둘 다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는 생전 맛 본적이 없었는데 그 집 메뉴판에는 유독 에스프레소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허무할만큼 자그마한 잔. '코딱지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 잔이 나왔다. 요즘 유행한다는 달고나 커피 같은 곱고 진한 갈색 토핑같은 것이 보이는. 맛이 쓰고 진하다는 것은 알고 있던터에 소줏잔 같은 것에 담겨나오니 그 형님과 나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시원하게 원샷(!)을 땡겼다. 왠지 에스프레소는 그렇게 마셔야하는 것 같았으니까.

시멘트라도 녹일만한 위장이었지만 커피에는 약한 터라 차를 주로 마시면 살았던 내가 그 쓴 에스프레소를 원샷으로 들이켰으니 이내 목구멍부터 소장까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왔다. 아놔. 이런 맛없고 쓰기만 한 커피들을 왜 마시는거지? 이후로 에스프레소를 입에 들이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십년 쯤 지나 렌트한 차를 끌고 이태리 여행을 하게 되었다. 스타벅스조차 발 디딜 수 없다는 커피의 나라.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해서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커피부심의 나라. 어디를 가든 맡을 수 있는 커피 향내에도 무심했던 나는 늦은 밤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에 삼삼오오 앉아, 아니 삼삼오오 서서 행복한 얼굴로 에스프레소를 들이키고 있는 모습들을 보며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이 인간들이 죽고 못사는 원조 에스프레소 맛이란게?

그래, 너도 한 잔 해보렴...하고 말하는 듯한 눈빛들 사이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소줏잔 털어넣듯 원샷을 때리기엔 아픈 기억(?)도 있고, 그 쬐그마한 양을 몇 차례에 나눠서 홀짝 거리는 주변 모습도 있고 하니 나 역시 조금씩 홀짝홀짝 커피를 들이키게 되었다.

와.. 이거 겁나게 맛있네?

여전히 생크림으로 달달함을 가미한 아이스 모카 정도나 마시던 내게 쪼그맣고 진향 향내의 이태리 원조 에스크레소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역시 현지 오리지날은 믿을만 한가 싶기도 하고.

에스프레소에 마음을 열었음에도 좀처럼 커피를 생활화하지 않던 내가 쌉싸름한 한 잔을 떠올린다면 그건 오로지 내 혀와 뇌세포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부디 전 세계 코로나 국면이 진정되어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생활 속으로 돌아갔으면 싶다. 에스프레소 한 잔도 함께.


Comments 1


저는 이태리 여행중에도 커피를 안 마시게 되더라구요. 체질에 안 맞나 봅니다...

24.04.202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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