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1장] 독서쟁이 75 - 언어의 온도(이기주 저) 24_자신에게 어울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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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안톤 체호프가 쓴 희곡 중에 '벚꽃 동산'이란 작품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봉건 귀족 사휘가 붕되하고 신흥 부르주아가 부상하는 과정을 날카롭고 처연하게 그린 작품이다.
몰락한 지주 라네프스카야는 호화로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남은 거라곤 곧 경매에 부쳐질 벚꽃 동산뿐이다.
하필 왜 벚꽃 동산일까. 안톤 체호프는 어떤 이유에서 벚꽃 동산을 희곡의 무대로 삼은 것일까. 태 생각은 이렇다. 한껏 흐드러지게 피다가 일순간 꽃비를 흩뿌리며 사라지는 벚꽃이, 짧디짧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친척들이 라네프스카야에게 변활르 강요하면서 이야기의 갈등이 고조되고 극은 막바지로 치닫는다. 그녀의 친척과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어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과가에 갇혀 사는 라네프스카야의 귀에 이런 조언이 들릴ㄹ 리 없다. 결국 그녀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영지를 떠나게 된다. 벚꽃 나무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뒤로한 채.
연극을 본 뒤 감정이입을 해봤다. 내가 그녀였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녀의 터전인 동산을 갈아엎어 재개발을 추진하거나 해당 지자체 도시계획위원회에 놀이동산으로 용도 변경을 신청했을까.
살다 보면 누구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들어서기 바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뱅뱅사거리나 세종로사거리와 달이 인생의 사거리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이정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내판이 없다는 건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보다는, 애초에 길이 없으므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정해진 길이 없는 곳을 걸을 때 중요한 건 '솔직함'이 아닐까 싶다. 눈치과 코치에만 연연하다 재치 있는 결정을 내리기는 커녕 삶을 그르치는 이들을 나는 수없이 봐 왔다.
가끔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 욕망과 상처를 끄집어내 현미경 들여다보듯 꼼꼼하게 관찰해봄 직하다.

솔직히 말해, '솔직하기' 참 어렵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한다. '남'을 속이면 기껏해야 벌을 받지만 '나'를 속이면 더 어웁고 무거운 형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형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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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202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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