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1장] 독서쟁이 75 - 언어의 온도(이기주 저) 23_희극과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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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오송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소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소음이 열차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사내가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들 정도의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기차 속도에 비례해서 그의 목소리 데시벨도 줄기차게 상승했다. 사내의 입에 '부부젤라' 같은 응원 도구를 이식해 목소리를 증폭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내는 통화 상대에게 잔뜩 화가 난 듯했다. 한 시간 가까이 열과 성을 다해 말을 이어갔다.
난 그의 목소리를 억지로 들으며, 현역 시절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폭넓은 활동량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박지성 선수를 연상했다. 사내의 지구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통화 내용도 엿듣게 됐다. 그가 토해내는 모든 얘기가 내 귀로 날아들었다.
"그 친구는 남을 배려할 줄 몰라!"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음, 본인에게 하는 말인가. 그렇다면 통화를 하면서 자아 성찰까지 하는 것인가. 급기야 사내는 통화 막바지에 폭발적인 고음을 자랑하는 가우가 샤우팅을 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난 말이지 똑같은 말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야. 난 말이지 똑같은 말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이야!"

난 이 문장이 왜 이리 웃기던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희극적 요소가 다분하지 않는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아"라는 말을 되풀이하다니. 역시 사람은 흥분하면 자신이 내뱉는 말과 행동을 비교하거나 대조하지 못하는 법이다.
다만 한편으론 사내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건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이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해 현대인의 비극적 자화상을 고방하는 행위 예술 일지도 모른다는, '꿈보다 해몽' 식의 상상을 하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던가. 세상하는 멀리서 보면 희국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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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2021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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