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og RPG] 프롤로그 – No.1036은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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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이제껏 우주에서 최장 시간 흥행을 기록한 전설의 현재진행형 게임 Analog RPG.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게임은 지구라는 작고 귀여운 초록별에 인간이라는 한 개체로 태어나 온갖 이벤트를 경험하며 레벨업을 한다. 특이사항으로 캐릭터는 랜덤으로 선택되며 결코 다른 유저와 중복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운발 게임. 현재 78억 명의 활성 유저를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플레이에 지친 상당수가 Auto 모드로 게임을 돌리고 있다고 추측된다. 그 밖에 특징으로 캐릭터마다 수명이 랜덤이며 복잡한 연쇄작용에 의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게임이 전개되는 점이다. 심지어 개발자가 고안한 적도 없는 이벤트가 저절로 생기기 부지기수 사실상 개발자는 쉽게 돈 벌고 있다. 한마디로 자생적으로 굴러가는 상당히 묘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유저 중 일부는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서버가 폭발해 하루 아침에 게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음모론을 신봉한다.


소문에 따르면 개발자 업데이트는 1,000년째 중지 상태이다. 그러나 개발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현재로서는 없다. 캐릭터에 따라서 컨트롤이 안 먹히는 오류가 자주 발생해서 몇몇 유저들의 불평이 자자하다. 당연히 캐릭터들은 캐릭터답게 자의식이 없으며 자신이 게임 속 캐릭터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유저 커뮤니티에 의하면 최근 신종버그가 발생해 자신이 가상 속 게임 세계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눈치채서 아예 통제에 벗어나는 캐릭터가 발생하는 사고가 종종 벌어지고 있단다. 그들은 이 같은 현상을 ‘독립’이라 부르고 ‘독립 캐릭터’로 구분한다. 독립한 캐릭터는 어쩐지 본인들의 인생이나 생각 따위를 기록으로 남겨두는 데 강한 집착을 보인다. 아마 보통 캐릭터들이 독립 캐릭터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데다가 수명이 랜덤이라는 점, 이 세계가 거대한 농담에 불과하다는 허무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 캐릭터들의 기록은 유저가 접근 불가한 서버에 기록되고 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저는 ‘독립’현상이나 ‘독립 캐릭터’ 따윈 없으며 게임을 졸라 못하는 좆밥들의 흔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참고로 이 매뉴얼을 읽는 유저는 아무도 없고 나 또한 쓰고 나면 다시 볼 자신이 없다. 게임 잘하는 사람 치고 매뉴얼 읽는 사람 본 적 있나? 명색의 게임인데 매뉴얼이 있는 게 간지가 난다 생각한 회사 측에서 하도 부탁해서 억지로 쓰고 있다. 당연히 내가 누군지는 비밀이다. 게임 실력도 비밀.



[캐릭터 소개]

No. 1036

설명 안 하고 넘어가도 문제없는 캐릭터나… 굳이 설명하자면,


성별 여자, 동양인,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키와 체구가 작고 시력이 짝눈임.
달리기를 제외하면 전반적인 운동 신경이 떨어짐.
면역력은 좋으나 체력소모가 빠름.
통제광이라 컨트롤 잘 안 먹힘. 빡침 주의
전반적으로 고르게 능력치가 분포되어 있으나 불충분, 애매모호함.
자기가 힐러라고 생각하나 힐러치고 마나 수치가 딸림.
예술적 능력치가 떨어지는데 그나마 ‘글’을 씀.
눈치가 빠르고 소심함.
감정 기복이 심하고 감정 기복에 따라서 전체적인 게이지가 달라짐.
매력도는 평범하나 소수의 캐릭터에게 의외로 잘 먹힘.
마이너이자 아웃사이더, 그러나 사람 운이 좋은 편.
지겹게 사랑 타령 해댐. 말 많음.
의미부여 실패 시 아무것도 안 하고 온종일 누워 있음. 진짜 하루 죙일. 어휴

한마디로 꽝이라고 보면 된다. 신경 쓸 것도 많고 요구 조건도 더럽게 많은데 캐릭터가 컨트롤도 잘 안 먹힌다. 오류랑 싸우다가 화병 날 수도 있음. 근데 딱히 단점을 상쇄해주는 필살기도 없고, 체력도 구려서 포션 값도 안 나옴.


대체 이딴 거 왜 만들었냐고 따져도 할 말 없는 수준. 그러나 밸붕을 걱정한 개발자가 특별히 각성 모드인 ‘사랑 부스터’를 급조로 욱여넣었다고 전해짐. 부스터가 발동되면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고 특히, 열정, 용기, 결의가 만땅으로 차오름. 그러나 100명의 유저 중 이 부스터 모드를 구경했다는 사람은 1, 2명에 불과하다고 함. 안 나오길 ‘뽑기 신’께 기도하시라.



‘건강결과진단서를 발급하기 위해 지나는 사거리에서 장미꽃과 파란 하늘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건 게임이구나. 나는 게임 속 캐릭터야. 지금 메타버스 시대가 곧 도래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이미 메타버스에 있어. 난 게임 대신 ‘현실’이라고 부르는 여기서 이 RPG 게임을 하겠어. 이걸 사라지지 않을 공간에 기록해야겠어. 이건 RPG구나. 체력도 레벨도 경험치도 확인할 수 없는 캐릭터. 게임의 목적 따윈 알 수 없어. 아니 없어. 그렇다면 목적은 내가 만들 거야. 앞으로는 휘둘리지 않고 내가 플레이하겠어. 앞으로의 삶을 기록해야 해.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이 게임을 즐기자!’


여기까지가 유저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No.1036의 마지막 기록이다. No.1036 캐릭터는 2021년 5월이 끝나가는 어느 오후 갑작스럽게 ‘독립’ 오류가 발생했다. 독립 캐릭터로 분류되어 이번 수명이 끝날 때까지 유저 컨트롤이 전혀 안 먹힌다. 그러나 걱정 붙들어 매라. 차라리 잘됐다. 다음에는 더 좋은 캐릭터를 뽑게 될지 모르니 유저로서는 하등 아쉬울 이유가 없다. 물론, 추가 결제는 필수다.


본캐와 부캐가 같은 사람들, 글과 삶이 같다고 믿는 꽉 막힌 사람들. 세계에서 독립해 나온 사람들이 함께 모여 기록을 하기로 했다.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하고 불확실성의 아날로그 세상을, 세상이 게임이고 우린 한낱 캐릭터라도 기록한다. 글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니까. 이건 그들의 숨겨진 기록 중 일부이다.

아날로그 RPG 시작합니다.


2021년 5월 27일, by 고물


Comments 12


자신이 개발자임을 잊은 No. 1036호^^

27.05.202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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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괜한 캐릭터를 만든 게 수상했는데! 1000년이 지나 코딩하는 법을 다 까먹었데요 :D

27.05.202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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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졸라 못하는 좆밥들의 흔한 변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게임 현질 가능한거로 알고 있어요!!!

27.05.202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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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코드 알아주는 오이님 훗-

요새 현질이 너무 심하다고 질타를 많이 받고 있죠.
메뉴얼에 따르면 유저들이 과금없이도 즐겁게 플레이하도록 초반에 고안되었는데, 욕심쟁이 개발자가 장난 친 이후로 현질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비운의 게임. 여전히 핫하다 핫해

27.05.202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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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을 드셨군요.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날로그 RPG 게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게임 중이라는 사실을 도로 잊는 거랍니다. 결과를 알고 보는 영화는 재미없자나요. 달리기는 잘 하신다니 따라 잡아보셔요. 마법사는 백마 타고 활공 중, 휘리릭~

27.05.202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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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의사항에 빨간약은 뱉어낼 수 없다고 하네요.
특기는 과도한 몰입과 공감력으로 아마 대부분의 나날 잊고 지낼 1036호입니다. 게임하는 건 알아도 아직 게임의 결과는 모른답니다.
그나저나 백마 타고 활공 중이시라니ㅠ!! 튼튼한 두다리로 달리고 달려서 곧 날아갈겁니다~

27.05.20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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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박하당 'ㅡ'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저 No.572 (닉네임 : 뉴발)
자기가 '데미지딜러'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공격을 못 함.
공격한다 해도 타격감 없음.

[No.572 캐릭 특이사항]
그 복잡한 연쇄작용 속의
무수히 많은 EVENT 중,
연애EVENT 와 결혼EVNET 가 발발하지 않음.....주륵 ㅠㅠ

27.05.202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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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5.202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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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72 님 반갑습니다.
러시아의 그녀 No.573이 기다리고 있다구요!!

27.05.202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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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님은 제 마음속의 바드입니다! 딜힐 가능 ㅋ

27.05.202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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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택슨님께만은 최강바드!!! 강역딜 넣어드릴게요.

27.05.202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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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편한테 바드가 뭐야? 라고 했더니 그거 놀고 먹는 음유시인이잖아. 그래서 어?! 나잖아. 했다는 ㅋㅋㅋㅋ

27.05.202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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